근황
벌써 5월 중순이다. 올해도 반이 성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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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선택권을 가지고 있는지를 가늠해봤다. 손에 쥘 수 있는 것들 중 마음에 꼭 드는 게 없다는 걸 알았고, 겸손해졌다. 그렇다고 나 잘난맛에 살던 날들이 한꺼번에 무너지진 않는지 기가 많이 죽진 않는다. 이 다음은 좀 더 낫겠지 뭐. 그러나 조금씩은 흔들리고 바스라진 구석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낀다. 어느 날 샤워를 하다 몸 어느 구석에 멍든 자국을 발견하는 것처럼 자신감이 손상된 순간이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따금씩 예전같지 않게 벌벌 떠는 나를 본다. 치기어린시절 가뿐히 무시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이제는 외면하지 못한다. 왜그런고 하니 과거의 내가 확신했던 미래를 지금의 내가 살고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걸 이 몸으로 너무도 분명하게 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내가 또 2년만 기다려봐 해도 예전처럼 패기있는 목소리가 나오지가 않는 것이다. 불안하다. 지금의 내가 그렸던 나와 다르다고 해서 패배자의 기분을 느낀다거나 그렇진 않지만 언제까지 항상 이렇게 약간씩 아쉬운 듯한 기분으로 살아야하나 싶어서. 이번에는 좀 더 성큼 나아가듯 살아보자고 몸에 힘을 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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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아주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해서 종종 가는데, 최근에는 그 곳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어서 무척 즐거웠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예상치 못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게되는 순간은 늘 짜릿한 기분이 든다. 다들 예술가들이여서 더 흥미로웠는데, 자기만의 색을 뿜어내는 일에 집중된 일상이 말투 하나 제스쳐 하나하나에 익숙하게 배어있었다. 파리에서 태어나 런던에 오래 머물렀다던 외국인 친구는 음악작업을 하고있었는데 모든 트랙을 들려주면서 15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듯 생생한 액팅으로 설명해주었다. 깜찍한 미친 외계인 같았다. 어떻게 하면 저렇게 미친놈처럼 살 수 있는건지 부러웠다.ㅋㅋㅋ 아무튼 그 계기가 이번 달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데 영향을 좀 미쳤다. 어서 여기 말고 다른 환경, 다른 세계 속에 놓여있고 싶다. 단순히 다른 시스템과 다른 문화. 내가 익숙해하는 환경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정이 우선이긴 하지만, 지금의 나를 익숙해하는 주변환경 또한 나를 빌빌거리게 한다는 느낌도 든다. 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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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누군가로부터 달달한 관심을 받았지만 그에 대한 진정성을 느낄 수가 없어 잘라내버렸다. 잘라내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주변에서는 답지 않게 왜 그러냐고 했지만 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확실하게 잘라내는 것이야 말로 답게 했다고 생각한다. 예나 지금이나 나에게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앞뒤가 다른 사람이다. 나는 그런 사람과 영리하게 잘 싸워 이겨낼 재간이 없기 때문에 그냥 끊어내버리는 것만이 답이다. 그런 사람들이 꼭 악의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는 없기에 싸운다는 표현이 좀 부적절한 것 같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그냥 나랑 뇌구조가 다른 것 같아서 불편하다. 본인이 유리한 방향으로 모든 상황을 몰아가는 본능같은게 있는 것 처럼 느껴진다. 무의식적인 자기보호능력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작은 상황 하나하나까지 불편하다.
또 새로운 사람, 새로운 대화가 필요하다. 요즘은 그게 또 나를 활기있게 만드는 시기인 것 같다. 예전에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익숙하게 만드는 과정을 즐거워해서 많은 에너지를 들였다면 이제 새로움은 새로움 자체로 즐긴다. 익숙해지지 않아도 상관없고,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새로움도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새로움은 새로움이 아닌 것 같다. 이미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잘라내는 것도 처음이 어렵지 근 몇년 전 해봤더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면서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잘려나간 사람이였을 때의 불쾌함을 알기에 약간이 미안함도 느꼈다. 누가 뭘 잘못해서 그랬겠나. 그저 서로 상생할 수 없는 관계도 있을 뿐이다. 라고 생각해야 마음이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