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당한다는 느낌도 나의 세계가 존재할 때나 온다.
#1
최근에 이사를 했다.
이전에 살던 집은 보딩하우스라 여러사람이 각각의 방에 사는 기숙사같은 곳 이였다. 방에 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고 공간도 나에겐 충분히 넓었다. 시티에 걸어서 갈 수 있을 정도로 아주 가깝고 트레인역과 마트, 공원 등등 위치가 참 좋았다. 비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엔 벽에서 비가 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별 불만없이 2년 넘게 잘 살았다. 그런데 욕실을 같이 쉐어하는 옆방에 아주 매너가 없는 사람이 이사를 들어오면서 매일 매일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이사를 하게 되었다.
호주에서 이사를 꽤 많이 했는데, 이제 이사를 자주 하기엔 짐이 많아져서인지, 살고있던 집이 가성비가 꽤 괜찮았어서인지 집을 결정하는데 시간이 제법 오래걸렸다. 2년 넘게 만족하면서 살았던 집이라 나오기로 결정하고나서 이 곳 보다 더 좋은 곳을 찾을 수 없을까봐 괜시리 불안한 기분도 들었던 것 같다. 인스펙션도 엄청 많이 다녔고, 예약금도 한 번 날렸다.
이사한 집은 인스펙션 한 당일에 결정할 정도로 마음에 쏙 들었다. 두명의 플랫메이트와 함께 사는 아파트인데 방도 넓고 창도 크고 욕실도 나 혼자 쓸 수 있어 좋다. 동네는 시티랑 약간 떨어져있어서 교통이 불편할까 좀 걱정을 했는데 살아보니 단점이 아닌 장점이다. 집 근처에 랜덤한 유동인구가 있는게 아니라 동네 주민들만 있으니 더 안전한 느낌이 든다(사실 이제 시티에 나갈 일도 별로 없음) 물론 가격이 좀 비싸긴 하지만 정해둔 버짓 내에서 해결했으니 괜찮다. 아니 나아진 내 삶의 질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지불하고도 남을 가격이다.
#2
뭘 어떻게 해도 어수선해보였던 이전 집에 비해서 새로 이사 온 집은 내가 가구까지 다 골라 들고와서 그런지 정말로 내가 꾸린 티가 난다. ㅡ 중고로 두어개 들고 온 거라 취향을 반영했다기 보다는 눈에 거슬리지 않는 정도지만ㅡ
밥을 잘 차려먹고, 침대를 정돈하고, 옷을 아무데나 벗어두지 않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데 공간이 달라지니 이런 나의 습관들이 나를 대접해주는 행위로 바뀐 느낌이 든다. 노력 대비 결과물이 너무 좋아진달까.
이전 집도 열심히 정리를 하고 청소를 했지만 비가 샜던 벽의 물자국을 지울 수는 없었다. 가구가 마련된 방에 몸만 들어왔던지라 그 애매한 나무색의 투박한 선반도 회색의 철제 수납장도 있는대로 써야 했고, 거실이 없으니 요리하고 밥을 잘 차려도 책상 위에서 먹어야 했다. 사실 거기 살 때는 이런 것들이 불만이였던 적이 없는데.
이사를 와 보니까 달라지는 것이 정말 많다. 더 나은 일상을 만드는 쉽고 작은 노력들이 더 쉬워지고 다 너무너무 소용이 있어진다.
이전에는 책상 위에서 영상물을 보면서 밥을 먹곤 했는데, 지금은 식탁에 앉으면 창밖에 나무가 보이니 아무 전자기기 없이 조용히 밥을 먹게 된다. 맛을 천천히 음미하는 느린 식사가 즐거워졌고 그러니 요리도 더 정성스레 잘 차린 식탁을 만들게 된다. 흰색 가구들과 함께 잘 정돈된 방은 들어갈 때마다 기분이 참 좋고 안정된 느낌을 준다. 매일 아침 환기를 시킬 때마다 나무 내음이 들어오니 그에 어울릴 향수를 방에 종종 뿌리게 된다. 욕실은 쓰고 난 다음에 세면대와 거울에 물기를 매번 닦고 나오게 되었다. 물기를 닦는건 5초면 되는데 물자국 없는 거울과 수도꼭지를 쓰는건 호텔 욕실을 쓰는 것 처럼 기분이 좋더라. 욕실을 다른사람과 쉐어하지 않으니 나의 이런 노력을 아무도 망치지 않는다.
그래 이렇게 매일매일의 기분좋음을 유지하는 것이 참 중요한거였지. 매일매일이 인생이니 중요해 마땅하지.
#3
플랫메이트들은 내가 이사온지 며칠 지나지 않아 한동안 집을 비우게 되었다. 그래서 집에 혼자 남아 있게 되었는데 생각해보니 집에 혼자 살아보는 경험은 처음이구나 싶다. 한국에서는 가족들과 함께 살았고 호주에 오고나서는 늘 플랫메이트들이 있었으니.
코로나 사태때문에 재택근무를 하게 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은 더 길어졌다. 처음엔 조금 무섭고 어색한 기분이였는데 점점 더 편안해지고 나만의 시간을 즐기게 된다.
혼자 산다는 건 내가 일상적으로 무엇을 좋아하는지 더 자주 깨달을 수 있게 해준다. 좋아할만한 것들을 시도해보고, 반복하고, 습관이 되어서 인생의 한 부분이 되는 과정을 겪는데 요즘은 이게 자주 일어나서 탐색과 발견의 순간을 바로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리고 그 탐색의 범위와 자유도를 정하는데 공간이 꽤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부엌과 거실이 생기니 나는 매일 아침 커피와 빵을 구워 먹고, 과일차를 하루에 서너번 마신다. 쿠키도 그릇에 예쁘게 담아서 먹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식기는 쓰고 난 후에 바로 설거지를 하고 마른 식기들도 잘 정돈해두는 게 좋다. 그냥 정돈된 그릇을 보는것만 해도 기분이 좋다.
이전 집에서는 밖에도 잘 나가지 않고 주말 내내 모니터를 너무 오래 보고 있어서 두통이 있었는데, 이제는 통유리가 있는 방에서 아무 생각없이 멍 때리며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노을이 지는 하늘을 구경한다. 침대에 누워있기보다 거실에 앉아서 뭔가를 한다. 잠깐이라도 매일 집 앞 공원을 산책하고 들어온다. 풀 냄새를 맡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에게 눈길을 준다. 햇살이 따뜻한 날엔 이북리더기를 들고 나가 공원에 앉아 햇볕을 쬐며 책을 읽기도 한다. 뇌가 쉰다는 느낌이 든다.
내가 나를 잘 챙겨주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진다.
#4
한국에서도 이런 공간이 없어서 참 불편했지만 그 땐 나름대로 혼자 즐기는 시간들이 있었던 것 같다. 집이 불편하니 집 앞 카페를 내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대형 서점에 가서 책을 보고, 전시를 보러 다니고, 비가 오는 날 산책을 했고, 괜히 아무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냈고, 필름 카메라를 들고 서울 구석구석을 다녔다. 혼자해도 괜찮다는 느낌보다는 혼자라서 더 충만해지는 시간들이였다. 내 감각에 집중해주는 시간들.
그 땐 이런 시간들이 침범당하는 것, 방해받는게 싫다고 느껴서 일부러 핸드폰을 무음으로 바꾸고 가방 깊숙히 넣어두고 다녔다. 이런 날들이 있었다니 지금 생각해보니 놀랍다. 지금의 나는 노트북과 핸드폰을 떨어트려 놓고 지내는 일이 거의 없고,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시간이 늘 모자라는 느낌이였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호주에서는 친구들이 무척 그리울 때가 있다. 혼자 즐기던 시간 못지 않게, 혹은 그보다 훨씬 더 그립다. 포장마차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던 시간, 한강바람을 맞으며 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시덥잖은 이야기로 웃다가, 또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던 따뜻한 말들을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던 날들이 눈물나게 그리울 때가 있다.
어떤 결핍이 먼저 채워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혼자 충만해지는 시간이 생기기 시작하니 그 결핍이 사라지진 않아도 그에 대해 잊을 수 있는 시간이 좀 생기는 것 같다. 그냥 어떤 부분이 채워지는 느낌이 든다. 혼자 채울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서야 채우고 있나보다.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잃어버린 것도 잊었던 어떤 것을 회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