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gone:: 2024. 12. 1. 02:00

 

# 억까. 주여. 삼재.

 

2023년부터 시작된 위기가 이어졌던 2024년이였다.

 

23년 회사 구조조정으로 인해 실직당한 것을 시작으로 이래저래 비자문제가 꼬여서 24년 1월, 한국으로 귀국하게 되었다. 사실 이렇게 한 줄로 끝날 간단한 사건은 아니였고.. 상황이 처음 들이닥쳤을 때는 그 심각성을 잘 몰랐고, 뜨순 물에 개구리가 서서히 익어 죽어가듯이 상황이 점점 나빠져서 내 상태도 그런식으로 나빠졌던 것 같다. 시간 안에 해결해야하는 일들이 많았어서 머리가 차가워졌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수습을 못 할 정도로 무기력이 오기도 했었고, 부들부들 화가 났다가, 또 울며불며 해결하려 애를 쓰면서 지낸 시간이 1년 정도 된 것 같다.

 

사실 상황 자체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불가항력의 자연재해같은 일인데 어쩔 수 없지' 하면서 받아들이려고.. 노오력..했지만.. 시팔 왜 하필 나야.. 상황을 그렇게 받아들인다 한들 그 재해를 입은 내 '심정'이 나아지는건 아니잖아? 하.. 시팔 고통 그 자체였음.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좌절과 뒤섞인 여러 감정들이 있었는데.. 후회와 불안이 있었겠고, 다른 감정도 많았던 것 같은데 욕밖에 안떠오르는 것 보니 누구를 향할지도 모르겠는 쌍욕만이 내 깊은 빡침을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는 머리 속으로 후회목록을 줄줄이 만들었다. 실직 후 구직 초반에 스폰해준다는 회사 안 들어간 것을 후회. 작년 영주권 신청 들어가기 직전에 1년짜리 개꿀비자였던 코로나비자 신청하지 않은 것도 후회. 백업으로 독립기술이민으로 영주권신청을 안했던 것도 후회.. 이런 생각들 해봤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걸 너무나도 잘 알지만 만약에..만약에.. 하면서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그 모든 기회와 상황들이 구체적으로 머리에 떠올라 괴로웠다.

 

남반구의 건조하고 따가운 햇볕에 눈 찌푸리다 하루만에 맞이한 한국의 한겨울은 정말 차가웠다. 자정을 넘긴 새카만 밤에 눈 쌓인 빙판길에 캐리어 질질 끌며 걷던 귀국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그와중에 횡단보도에서 신호등 안 지키고 달리는 미쳐버린 택시는 그 날을 더욱 강렬하게 만들었음. 정말 도착하자마자 위험하고 척박하다 느꼈다. 

 

몸과 마음이 다 지쳐 너절했던 상태였고.. 한국에 오자마자 일단 쉬고싶었다. 제주의 이름모를 숲 속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갔다. 제주도도 눈태풍이 휘몰아쳐서 친구집에서 거의 나가지 못했는데 오히려 좋았다. 난로에 뜨끈히 데운 달콤한 귤을 까먹으며 동물들을 쓰다듬고, 친구가 정성스레 차려준 밥을 먹고, 도자기를 빚는 친구의 손끝을 지켜보며 평화롭고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마음에 따스한 무언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있었다.

 

제주에서의 짧은 휴식을 마치고 다시 올라오니 휴가시즌에 지원했던 회사들이 업무복귀를 했는지 한꺼번에 인터뷰가 잡혀서 한동안 또 바쁘게 보냈지만 전부 최종까지 가서 탈락.. ㅎ.. 이 정도의 억까에서 도저히 건강한 정신상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이후로는 친구들을 만나 하소연하고 위로받지도 못할만큼 멘탈이 개같이 털려있어서 아주 친한 친구들 몇 명 빼고는 귀국 소식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의정부(엄마집)에 있었다. 근데 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는 나를 더 불안하게만 만들어서.. 이 연속적인 좌절에서 벗어날 무언가를 하고싶었다. 구직할(거절당할) 여력은 없었기 때문에 이것부터 우선 싹 그만두었고.. 비자신청을 위한 시험공부를 시작했다. 운의 힘이 좀 덜 작용하는(아님) 작은 성공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음. 이런저런 영주권 포인트 올리는 점수를 만들고나니 약간 회복이 되었는지.. 중순부터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해서 얼굴 보고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받고 우리네 인생 왜 이렇게 개억까당하는겨 하면서 같이 욕하고 놀고 먹으면서 시간 보낸 것 같다.  뭐 또 그 와중에 내 멘탈 털어가는 사건들은 아주 여러 방면으로 있었어서 너무 너무 힘들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회복이 되는 부분도 있어서 하반기 들어서면서부터는 나름 안정을 찾아갔다.

 

그러다가 10월 말에 영주권 관련 서류 중에 잘못될 이유가 1도 없는데 잘못되는 일이 있었다.  이때는 뭔가 마음 속인지 머리 속인지에서 뚝 하고 끊어지는 느낌 있었다. 존나게 화가 나는 동시에 머리가 차가워지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도 나오고 뭐 어쩌라는거지 싶었음.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1년 안에만 다시 호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1년이 거의 다 되어가는 시점에 이런 일이 생기니 온 우주의 힘이 일부러 나를 호주에 가지 못하게 잡아두는 것 같았다. 신의 계시인가.. 아니 근데 또 나는 신을 믿는 사람이잖아. 그래서 이때부터 진짜 하.. 모르겠다.. 그래..... 신.. 니 마음대로 하세요.. 하는 마음이 됨. 한낱 미약한 인간따리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절대자의 더 나은 뜻이 있겠지.. 혹시 내가 지금 호주로 돌아가면 존나게 더 위험한 그런 상황에 빠지나..? 신이 나를 일부러 고통에 빠지게 할리가 없음..  세상이 날 억까 하는 수준의 믿음으로 신에게 맡겼다. 이제는 호주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괜찮은.. 신이 내 인생 어떻게든 해주겠지.. 하는 상태가 됨.

 

이러고 일주일 뒤에 영주권 초대장을 받았다. (항상 타이밍이 이런식이여서 신앙심이 더 깊어짐..주여..) 헬스장에서 샤워하고 나와서 머리칼에 물기를 털며 핸드폰 보던 중에 이메일로 확인했다. 접수했던 여러가지 영주권 신청서 중에서도 지역 상관없이 그냥 아무데나 갈 수 있는 189스트림으로(암튼 제일 좋은거) 받아서 진짜 얼떨떨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팬티바람에 머리에 물 뚝뚝 흘리면서 눈 질끈 감고 주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집에 돌아가자 마자 방바닥에 주저앉아 감격의 눈물을 줄줄 흘렸다.

 

태어나지 않은 다른국가에 살아갈 권리 하나 얻은 것에 이렇게까지 감격스러움을 느끼는 나 자신에게 약간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바로 다음날 그 정도 감격 할 만큼의 권리를 얻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지금까지의 고생 정도는 오히려 가성비 좋은 대가를 지불한 것 같았음. 왜냐하면 같은 타이밍에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 당선되었거든.. 미국의 10대 개새끼들이 "your body, my choice" 외치는 꼬라지를 보면서 다른 종류의 절망감을 느끼던 와중에, 호주 총리는 여성혐오적인 컨텐츠가 10대 남자아이들에게 너무 유해하다는 것을 이유 중 하나로 들며 16세 이하 소셜미디어 금지법을 만들었다. 아, 나는 그냥 호주땅에서 일하고 먹고 살 권리를 얻은 것이 아니구나. 인간으로써 존엄하게 살 권리, 더 안전하게 살 권리, 더 내 상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회에 편입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구나. 감격에 겨워 기뻐 마땅했다.

 

친구들에게 축하 많이 받아서 기분 좋았다. 나는 생일도 무엇도 스스로를 위해 축하받는게 좀 머쓱한데.. 이건 아주 신나고 기쁜 마음으로 축하를 받았다. 올해 초 내가 돌아갈 곳이라 부를만한 집이 어디에도 없어 서러웠던 느낌과 아주 상반된 마음이 되었다. 호주도 한국도 내가 온전히 돌아갈 곳이라 느껴졌다. 호주는 영주권 덕분에, 한국은 참 여러모로.. 서울이 만들어낸 나의 결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친구나 가족들과 느슨해졌던 관계를 다시 다잡는 느낌도 있었고, 엄마와 마찰이 있던 것과는 별개로 엄마집에 1년동안 있을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게는 한국이 돌아갈 곳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이 정말 안전하고 편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박박 닦아 예비하신 길인 마냥.. 12월 16일 포근하고 아름답게 펑펑 내리는 눈을 기분 좋게 맞으며 한국을 떠났고, 17일 오전 무더운 여름날 시드니로 왔더니 마침 집이 빈다며 편하게 지내라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아주 편안하게 적응기간을 보내고 있다.

 

 

진즉에 만나려다가 큰 병을 얻어 수술과 회복으로 고생하다 하반기에 겨우 만날 수 있던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차 안에서 운전하며 했던 말이 맴돈다.

 

"우리 삼재였어. 올해가 끝이야."

 

올해 정말 이상하게 고생한 친구들 많았는데 삼재가 끝나서든 무엇이든 새해부터는 괴로움으로부터 멀어져서 따뜻하고 감사할 일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소망을 담아 친구들의 평안과 행복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정신건강

 

이제 회고 때마다 이 주제로 정리 한번씩 하는 듯.. 넘무 중요.. 

 

어릴 때부터 인생이 별로 편하게 흘러갔던 적이 없어서 전투적으로 사는게 생존하는게 익숙했는데 고작 몇년 좀 편하게 살았더니 전투력이 엄청 낮아져있었다. 세상이 죽어라 죽어라 하는 바람에 기필코 살아남는 것을 목적으로 살아왔던 나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일들을 못할정도로 무기력해진게 처음이라 뭔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인식하는데 오래걸리진 않았다. 음.. 아닌가..? 사실 위기상황이 오기 전부터 무기력에 시달렸던 것 같긴한데, 다른사람들도 으레 그렇듯 나도 번아웃이겠거니, 나이를 먹어서 점점 에너지가 떨어지는 것이겠거니 착각하는 바람에 방치한 시간이 꽤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근 몇년간 에너지가 없다는 말, 피곤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했는데 눈에 띄는 위기상황이 오면서 알아차린 것 같기도 함.

 

또 하나 평소와 다르게 이상했던 점은 감정이 무뎌지는 것이였다. 나는 언제나 내안의 내가 너무 많아서, 감정이 소용돌이 치는 바람에 마음이 다 헝클어져서, 내 살갖을 다 찌르고 지나가는듯한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서 힘들어했는데 그런 감정이 잘 느껴지지 않아 이상했다. 주변사람들도 상황이 너무 힘들것 같은데 초연해보인다고 했었다. 감정이 사라지니까 삶이 살아 숨쉬는 느낌이 안들고 식물인간이 된 것처럼 내내 몸을 수평으로 뉘인채 겨우 숨만 붙어있는 느낌이였다.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살기 귀찮다. 귀찮다는 감정만 점점 커져갔음.

 

상황이 해결되면 나아질 것 같기도 했지만 금방 해결될 일이 아니기도 했고, 해결하는게 또 귀찮지 않아야 해결을 하는데 계속 너무 귀찮은 감정만 커져갔다. 이대로라면 사는 것도 죽은 것과 다름없었음. 그래서 한국 도착하지마자 정신과 찾는다고 발품파느라 바빴다. 이런거 보면 역시 살아남고자하는 의지는 관성인지 본능인지에 잘 남아있었던듯..ㅋㅋ  ADHD 치료제, 항우울제, 항불안제류의 여러가지 약들을 처방받아 스스로 임상시험하는 느낌으로 맞는 약 찾느라 또 시간투자를 꽤 했고, 호주에서 화상으로만 뵙던 상담선생님과도 대면상담하면서 전문가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한국에 있는 동안 회복을 꾀하면서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들 때문에 지속적으로 정신적 데미지가 있어서 회복과 손상을 동시에 반복적으로 경험하는 듯 했다. 나를 다치게 하는 것들, 스트레스를 오래 두고 견디지 못하는 초민감인간이라 언제나 늘 거리두기, 즉 도망치는 일로 해결해 왔었는데 도망칠 여건이 되지 않아 발이 묶인 느낌이였고.. 그냥 계속 너무 괴로웠음. 너무너무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힘들었다. 늘 그랬듯이 가족이 그랬고, 한국이 그랬고, 한국적인 사람들이 나를 다치게했다. 하지만 역시 같은 것들이 나를 회복시키기도 했음.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종교가, 그동안 게으르게 키웠다 생각한 믿음이 큰 힘이 되었고 친구들, 가족의 다른면으로 부터 보이는 애정, 담배(음악들으며 숨만 쉴 수 있는 시간), 산책, 운동, 한국적인 풍경, 추운 계절같은 것들이 나를 회복시켰다.

 

다치고 회복하고..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도 크게 보면 애쓰는만큼 상승선을 그리고 있긴 했나보다. 지금은 상황이 나아져서인지 약의 도움 없이 기력도 의욕도 기분도 다 나아졌다. 여전히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긴 하지만 이건 원래 좀 그렇고.. 이것도 회사생활 시작하면 나아지겠지.

 

호주에 와서도 친구들에게 정신과 가는 것에 대해 심리적 벽을 낮춰주려고 이야기를 많이 하고있다. 우울증이든 불안증이든 ADHD든 그것은 증상일뿐, 그걸로 본인을 정체화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아픈건 상태이지 내가 아니지. 그 누구의 인생도 언제나 늘 좋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안좋은 상태일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게 당연한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진짜 개크게 깨달은 것이 있는데.. 호주는 날씨가 좋으니 디폴트 기분이 좋은게 장점인줄 알고 지금까지 살았는데 부작용도 있었다. 기분이 나빠질 상황에서도 날씨가 억텐으로 기분을 끌어올려서 그 감정을 온전하게 소화시키고 흘려보내기 어려운 것 같음. 한국의 사계절을 겪으니까 내 감정이 좀 휘몰아치는 때가 있다 하더라도 그게 자연스러운 것 같더라. 인간이 늘 행복한 상태로 있는게 좀 이상한거 같어.

 

내가 나를 다치지 않게 보호하고 불필요한 위험으로부터 도망치는 건 여전히 중요하지만, 인생의 다채로움을 온전히 느끼면서 사는게 자연스러운 것 같다. 물론 힘든시기가 다 지나가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 땐 너무 힘들었고.. 이런 상황이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불안했다. 근데 아무튼 나아지고 나니까 너무 오랜만에 느껴보는 홀가분함이 있음. 한국에서 1년을 보내지 않았으면 이걸 몰랐을 것이다. 이건 내가 앞으로 인생을 대하는 태도와 방향성에 큰 줄기가 되어줄 것 같음.

 

 

 

# 서울. 한국. 

 

태어나고 자라면서 정말 서울을 사랑하기도 혐오하기도 했지만, 결국 나를 지어낸건 서울의 어떤 것들임을 깨달았다. (경기에 있어보니까 한국도 아니고 서울임) 호주를 거주지로 두고 한국에 한두달 왔을 때랑은 완전히 다른 경험을 했다.

 

나는 너무나도 서울의 예측할 수 없어서 생기는 흥미로움과 불안이 뒤섞인 어지러운 환경에서 설계되고 지어진 인간인 것임. 시드니가 지루한 대신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도시지만 나랑 결이 안맞다. 약간 금수저로 태어난 나이브하고 착한 애랑 적당히 잘 지낼 수는 있지만 나와 절친이 될 수는 없는.. 그런.. 그런 느낌인 것 같음.

 

그리고 이상하게 서울의 도로와 골목, 가로등, 계절타는 가로수같은 익숙한 것들.. 한마디로 말하면 풍경..이긴 한데 그것도 한 몫 하는것 같다. 이건 내가 아직 정체를 잘 모르겠음... 

 

한밤중의 한강 말고는 그리운게 별로 없었는데, 호주에서 느끼던 알 수 없는 결핍의 실체가 서울의 어떤 것으로부터도 오고 있다는 걸 알았다. 서울.. 내가 떠나와서 별로 아쉬운지도 소중한지도 몰랐는데 실은 내 영혼의 중심같은 존재였음.. 사실 이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지금도 정확히 잘 모르겠고 좀 탐구가 필요하다. 

 

어쨌거나 서울에 머무르는 시간을 꾸준히 가져서 영혼이 너무 가난해지지 않도록 해야지. 다음부터는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올 수 있기를.. 서울도 호주에서 내가 정착할 어느도시도  나의 돌아갈 곳으로 여기면서. 

 

 

 

[2024.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