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응과 회복날들/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2025. 10. 26. 20:19
이사하면서 시드니 컨테이너에 맡겨놓았던 짐들을 드디어 꺼내왔다. 1년 반 전에 보관을 맡긴 물건들이라 어떤 박스에 뭐가 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뭐가 뭔지 파악하는데만 한참 걸렸다. 열어보니 버려도 되는 물건도 많아서 뭘 이런것까지 돈주고 1년 넘게 보관을 했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오래된 물건들과 멜번으로 오면서 임시로 쓰자며 샀던 값싼 새 물건들이 뒤섞여 거실에 쌓였다. 엉망진창인 거실을 보면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할지.. 힘이 죽죽 빠졌다.
너무 입사를 하자마자 이사를 했나. 새 직장에서 새로운 걸 배우고, 적응하고, 판단하고, 판단 당하느라 긴장도가 높아진 상태로 종일 지내다보니 퇴근하면 짐을 정리할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너절한 공간이 내 에너지를 전혀 채워주지도 못했다. 퇴근 후에는 저녁을 먹을 기운도 없어서 잠만 자는 날이 평일 5일 중 3일은 되었고 그나마 먹는 날도 배달음식이나 라면으로 때우면서 살았다. 이럴 때는 몸을 쓰레기통으로 쓰는 것 같다.
비싼 월세를 내고 엉망진창인 집에서 사는 날이 많아질수록 가성비를 챙기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지기까지 했다. 이대로 영원히 엉망으로 살게되면 어쩌지. 나는 이런 당연한 일상도 버거워서 어쩌지. 언제쯤 제대로 살 수 있지. 이런 생각이 드는건 불안이 많은 탓인가, 상상력이 많은 탓인가. 당연히 영원히 그렇게 살 일 없음 ㅋ.
이제서야 그 때의 내 생각을 바라보면 연민이 든다. 불쌍한 것. 당연한 일상이 아니였지. 절망만 느낄 일들이 폭풍같이 몰아쳤고 그걸 2년 내내 혼자 쌩으로 받아내면서 회복할 틈이 잠깐도 없었는데 당연히 피곤하지. 오히려 강한 편이지 싶다. 실은 그 일들을 제대로 다 소화하면서 가는 것 같지도 않지만 그래도 잘 버티긴 했어.
아무튼. 당연히 영원히 그렇게 살 일은 없다. 이사 후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그래도 거실을 쉴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주말에 두세시간씩 할애하면서 아주 조금씩 쫌쫌따리 정리를 한 결과이다. 여전히 거실 한켠에는 창고로 내려가길 기다리는 물건들이 쌓여있지만, 또 다른 한켠에는 제법 취향에 맞는 물건들을 골라 놓고 기분좋게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만들었다. 이제 거실에서 눕듯이 소파에 앉아서 창밖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한다. 혼자 조용히 회복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이 드디어 생겼다. 이게 얼마만이냐 정말..!
원래도 알았지만 새삼스레 공간이 얼마나 크게 내 정신건강에 영향을 주는지 느꼈다. 그렇게 회복의 시간을 조금이나마 보내니 최근에는 밥을 해 먹을 에너지가 조금 생겼다. 그동안 방치해서 다 썩어버린 식재료들을 싹 다 버리고, 새로 장을 보고, 신선한 야채와 고기들을 쉽게 꺼내서 쓸 수 있도록 잘 소분해서 냉장고를 채워 넣었다. 주말에 이 작업만 제대로 해도 돌아오는 한 주가 든든하다.
어제는 날씨가 쌀쌀해서 국을 끓여먹었다. 직접 해먹는 국은 대체 뭘까. 힘이 채워지는 것이 직관적으로 느껴진다. 게임 캐릭터의 HP 게이지가 띠리릭 올라가는 것처럼 국을 한술 떠서 호로록 먹을때마다 에너지도 올라오고 기분도 좋아진다. 오늘 저녁에는 버섯을 잔뜩 넣어서 파스타를 해먹었다. 파스타 오랜만에 하니까 양조절 실패해서 거의 2인분을 먹은 것 같다. 맛있었다.
찌개나 파스타는 배달음식으로도 많이 시켜먹었지만 역시 스스로 해먹는 음식이 최고인 것 같다.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하는 그 모든 과정이 나의 한끼를 위한 과정이라서 그런건지. 뭐 그렇게 대단하게 노력을 기울인 요리를 해서 먹는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크게 스스로를 챙기는 행위가 된다. 먹이는 나도, 먹는 나도 회복되는 시간. 몸 속에 정성과 위로를 채워넣는 시간.
온전한 사랑은 여기에만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사랑을 주면서 인정받고 싶다거나 주는 나를 알아주길 원하는 욕심이 완벽하게 배제된 사랑이여서.
익숙해지면 또 일상이 되겠지만, 오랜만이여서 생경하게 느껴지는 스스로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 잘 회복하는 주말이였어. 이제 깨끗하게 샤워하고 온라인 설교 틀어놓고 잠을 청해야겠다. 내일 개운한 월요일을 맞이하길.
'날들 >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살림 (0) 2026.06.15 근황 (0) 2026.03.07 이사 자축 (0) 2025.09.05 멜번에서 반년 (0) 2025.07.21 질문하고 듣고 소모되기 (0) 2025.02.2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