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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아정체성
    날들/의식의 흐름 2020. 10. 25. 14:32

    #1

    오춘기인가. 자아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서른 넘어서 또 하고있다.

     

    그간 나를 스스로 수식할 수 있는 말들이야 많이 있었겠으나 그래봤자 학생, 직장인, 여자 같은 평범한 말들이였을것이다. 수식이라기보다 카테고라이징을 구지 하자면 그런 역할 안에 놓여져 있는 거겠지만..? 그 역할 속에서 다들 성실하게 모범생, 유능한 회사원, 착한 딸, 사랑스러운 여자 등등.. 이 되기 위해 열심히 살고있다. 그에 반해 나는 그 기준에서 거리가 좀 있어서 종종 불성실한 학생, 당돌한(버릇없는) 신입, 이기적인 장녀로 불렸다. 그럴 때마다 쭈구리 같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잠깐이고(?)  왜인지(...) 크게 개의치 않고 살아왔다. 나한테 별로 중요한 역할이 아니였던 것 같다.

     

    내가 중요하게 여겼던 정체성은 따로 있는데 그건 '디자이너'로써의 삶이다. 유일무이하게 이것만 중요하다 여기며 산 건 아니다. 좋은 인간으로서 사는 것도 나에게 큰 인생 과제이지만, 디자이너로서의 어떻게 사느냐에 대해서는 특히 오랫동안 자주 치열하게 고민해왔다. 스스로 프라이드도 있고 사명감 같은 것도 있다. 이렇게 말하면 지금쯤 존나 잘 나가는 디자이너가 되어 있어야 할 것 같지만 나의 이상과는 별개로 실행력이 약해서 그렇지는 못하다.(..ㅠ)

     

    아무튼 이런 글을 왜 쓰기 시작했냐하면, 요즘은 디자인에 대한 열정도 정체성도 많이 약해졌고, 그에 뒤따라서 살아나갈 원동력도 약해지고 그냥 나 자체로서의 자아정체성에도 혼란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처음 있는건 아니다. 학부생 시절부터 년도를 따져보면 디자인 세계에 발 들인지 10년이 넘었는데 중간중간 진로를 바꾸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그림이나 음악같은 예술분야에서 뭔가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역시 내 길은 디자인이야.. 하면서 늘 돌아왔다.

     

    이번에도 그냥 그런 권태기일까? 하지만 지금은 딱히 한 눈을 팔고 싶은 다른 분야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일에 무기력한 시기도 아니다. 건강이 회복된 이후로 에너지도 기분도 정상범위로 돌아왔다. 진로를 고민 하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고민이다.

     

    실은 이게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이냐, 무엇으로 아웃풋을 던져놓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인 것 같은데 어쩌면 이 연결고리 자체가 점점 더 약하게 느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남의 아웃풋을 필터링 없이 멍청하게 받아들이는데만 익숙하고 내가 생산자로서의 역할을 거의 못하고 있다. 

     

    실제로 내가 남들에게 행할 수 있는 영향력의 크기와는 관계가 없다. 나는 내가 존나 먼지같은 존재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일말의 피드백이 돌아올 여지가 있는 생산 또는 창작활동을 하느냐 마느냐의 차이는 무척 크다. 그게 좋다 나쁘다의 피드백이 아니라 누군가 그걸 보고 나라는 사람을 인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의미있는 피드백이 될 것이다. 내가 세상에 인식이 되냐 마냐의 과정이니까. 

     

    그런 것들을 통해서 실존한다는 감각이 필요한데 그게 약해졌고 또 그렇게 된지 오래되었다. 디자인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꼭 디자인으로 실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나의 자아가 너무 많아 넘쳐서 곤란하던 시절의 나는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도 찍고, 노래도 만들었으니. 지금은 하나도 안하는군..

     

    #2

    창작이나 생산의 행위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인생은 존나 산 넘어 산.. 끝나지 않는 할 일들은 여전히 눈 앞에 늘어져 있고 요즘은 그걸 해나갈 에너지도 차올라서 제법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얻으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그래도 요즘 하루도 허투로 쓰지 않고 매일 바쁘고 스스로 발전하는 과정이 느껴져서 뿌듯하다.

     

    성실하게 사는 것과는 별개로 좀 덜 진지하고, 둔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 문제이다. 이 기분을 적확하게 표현하기가 좀 어렵다. 주체성이 약해진 느낌. 떠밀려 사는 느낌이 더 많은데 막상 이걸 왜 하고 있나 생각해보면 주체적으로 선택한 건 맞다.

     

    인생에서 늘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 묵묵히 쳇바퀴 도는 듯한 일상을 보내야 레벨업이 되는 인내의 시기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이 딱 그런 때 인 것같다.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정말 인내의 시간을 보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도리가 없는 것 같네. 이 시기가 지나고나면 다시 호기심 가득하고 싱그러운 시기가 오겠지.

     

    #3

    고민하면서 마음이 심란하여 이 블로그에 적었던 일기들을 시간 반대차순으로 반절 정도 읽어봤는데 20대 중반, 과거의 나는 정신이 훨씬 또렷하고 샤프하다. 내가 인간적으로 잘 발전해온 것이 맞나. 해외생활을 시작하면서 불안에 잠식되어있던 시간이 길었고 이걸 핑계로 어쩔 수 없었다고 자위하고 싶은데, 그러기엔 스스로가 너무 부끄럽다.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방식이 20대와는 사뭇 다르다. 모든걸 다 너무 괜찮다고 어르고 달래다가 버릇이 나빠진 아이가 된 것 같네. 그렇다고 꼭 20대의 내가 잘해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렇게 치열하고 화난 상태로 나를 끌고 온 것은.. 별로 건강하지 않은 것 같다. 뭐든지 밸런스가 중요하지.

     

    아무튼 과거의 나를 추적하다가 다시 실존주의에 빠져서 요즘 책도 다시 읽고.. 생각 정리하고 자극받는데 도움이 된다. 고맙다 과거의 나야.. 

     

    #4

    심란한 와중에 일상적 행복은 나름 잘 챙겨나가고 있다.

     

    오늘 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놓으니 비내음이 방을 가득 채운다. 이렇게 기분좋게 내리는 비도 참 오랜만이다. 빗내와 잘 어울리는 향수(롬브로단로)를 방에 뿌려놓고 빗소리랑 음악을 듣고있으니 기분좋다. 침대에 누워서 바깥공기 들어오는거 느끼면서 멍때리는 거 너무 좋다. 찬 공기에 약간 발 시려운 것도 좋음. 역시 나의 행복은 뭔가 자연과 연결점이 있어야 해..

     

    볼더링은 힘줄에 다시 무리가 와서 잠시 쉬고있고, 요즘 기타연습 다시 시작했는데 몰입하는 시간을 갖는 것 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많이 풀리는 것 같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쉐어메이트가 나만큼 집순이라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 그래서 마음껏 소리를 낼 수 없다. 언제쯤 혼자 살 수 있을까.. 혼자 살면 아무 때나 노래하고 춤추고 정말 신날 것 같다.

     

    이번 주는 정말 오랜만에 쇼핑도 했다. 전에 더운 날 낮에 걷다가 또 썬스트록이 와서 모자를 두개 샀고, 신던 신발도 너무 낡아서 새 신발 두 켤레 샀다. 사야지 사야지 생각만 1년 동안 하면서 미루던 걸 드디어 산 듯..  디자인도 마음에 들고 전부 다 세일가격으로 구매해서 더 좋다. 쇼핑 나간 김에 서점에서 느긋하게 시간도 보내고 키에르케고르 책도 샀다. 한국어로도 어려워했던 책이라 과연 영어로 잘 읽어질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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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NO-G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