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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12. 26. 22:28)
지금까지 취향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본 적 없이 그저 좋아하는 마음으로 즐기기만 해왔다면 최근에는 취향을 가지고 유지하는 것에 대한 필요조건에 대해 생각한다.
ㅡ취향이라는게 뭐냐고 물으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시간을 들이는 줄도 모를만큼 즐거운 마음으로 시간을 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취미라고 정의하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겠으나 내가 수동의 영역에 있을때는 취향, 능동의 영역에 있을 때는 취미가 되는 거 아닐까 싶다.ㅡ
취향을 가지고 유지하는데에 여러가지 조건들이 있겠지만 요즘 가장 간절하게 필요한 조건 중에 하나는 나의 취향에 함께 열광하고 공감해 줄 사람, 같은 취향의 결을 가지고 그 영역을 확장시켜 줄 만한 사람이다. 내 취향을 결정하는 필터링, 감성의 결은 내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다 한들 결국 그 세계를 열어주고 확장하는 것은 외부적 영향과 함께 이루어진다. 혼자서 우연히 발견할 수도, 찾아낼 수도 있는 일이지만 같은 취향의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 취향의 확장은 훨씬 더 잦아지고 강하게 이루어진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지난 삶에서는 몇 명의 친구들, 전 연인들이 열어준 세계들이 있다. 그들이 없었다면 몰랐을 전시, 공연, 책이나 영화 등을 통해 대개 하루만에 열린 세계였고, 강렬했고, 그 때 생긴 취향은 오래도록 유지되고 확장하고 있다.
시드니에서 가장 불만인 것은 내가 좋고 싫은 것을 필터링 할만한 충분한 요소와 이미 내가 좋아하는 나의 취향을 유지할 수단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왜 호주가 재미없고 지루한 도시라고 하는지 뭔가를 즐길 여유가 생긴 지금에서야 느낀다. 전체적으로 대중적이고 관광문화에만 신경쓰는 도시인 것 같고 매니악한 문화층이 존재하지 않아서 탐색할만한 충분한 세계가 없달까. 있다고 한들 쉽게 찾을 수가 없다. (사실 내 취향이 매니악한것도 아닌데?)
예를 들자면, 시드니는 정말 음악 취향이 놀라울정도로 편협하다. 유행하는 일렉트로닉이 나오는 클럽이 압도적으로 많고 미국에서 유행하는 팝 음악만 천편일률적으로 여기저기서 플레이된다. 괜찮은 재즈바나 힙합클럽 하나 찾을 수가 없다. 클럽 다니기 좋아하는 로컬에게 추천받은 힙합클럽도 가뭄에 콩나듯 힙합이 나와서 결국 DJ에게 틀어달라고 부탁했어야 했고(ㅋㅋㅋㅋㅋ) 그 마저도 10년 전에 유행하던 음악들만 반복적으로 나오더라.(덕분에 더 이상 클럽에서 놀 일이 없음. 집에서 넷플릭스 보며 맥주나 마시는게 나의 방탕함 최고치이다.)
대림미술관, 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시립미술관을 쭉 걸어서 이동하며 현대 예술 전시를 몇 개씩 볼 수 있었던 서울에 비해 재밌는 전시도 많지 않다. 이런 시드니를 친구에게 말하면서 우스갯소리를 한 적이 있다. "여기 애들은 사는게 편해서 사색을 안하나봐. 예술로 승화시킬 인생의 고통이 없는거지."
단순히 인구수가 서울에 비해 적기 때문에 그 다양성도 부족해지는 건지. 이유를 찾자면 또 이런 저런 해석이 되겠지만 내가 해결할 수는 없으니 해석은 관두기로 한다. 사실 내가 서울만큼 시드니를 잘 아는 것도 아니니까 다 모르는 탓도 있겠지. 그렇지만 1년 반 남짓한 호주에 살면서 대체로 새롭게 좋아하게 된 것들은 문화적인 것 보다는 자연환경에 대한 것들이 된다. '어디의 해변이나 공원이 좋아'라는 식.
어쨌거나 문화는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건데, 고유의 취향을 가지고 세계를 만들 사람도, 그 세계에 모여들어 세계를 유지하고 확장시킬 사람도 부족한 것 같다. (결정적으로 그 세계에 나를 데려갈 사람이 없어.. 엉엉..)
새로운 곳에 있으니 새로운 취미도 취향도 생기기야 하겠지. 그래도 취향이라는게 개개인의 아이덴티티를 부여하는 결정적인 요소 중 하나인데, 이제껏 즐겨왔던 나의 취미와 취향을 유지하지 못하니 나의 정체성도 흐려지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다. 남들과 비교해서 달라지고 싶다는 욕심은 없지만 내가 나 자신으로써 오리지널리티를 가지는 것은 나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온라인으로 말고 뭔가 좋아하는 것들을 체감하고 경험으로 계속 쌓으면서 나를 견고하게 만들고싶다.
다른방법이 뭐 있나. 좋아하는만큼 더 찾아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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